오르비에또는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96㎞ 떨어진 팔리아강(江)과 키아나강(江)의 합류점에 있다. 해발고도 195m의 바위산 위에 위치하며, 케이블카로 오르내린다. 주변의 비옥한 농업지대의 유통·산업·관광의 중심지이다. 부근의 농촌에서는 포도가 많이 생산되며, ‘오르비에토’라는 이름으로 생산되는 백포도주가 유명하다. 연철·도자기·레이스 등의 수공업이 이루어진다. 철도와 도로를 통해 로마, 피렌체와 연결된다.

고대 에트루리아의 12개 도시 가운데 하나로서, 뒤에 로마의 도시가 되었으며, 로마 시대 말기에는 우릅스베투스라고 불렸다. 12세기에 자치체가 될 때까지 토스카나 백작령의 중심지였다. 1448년에는 교황령이 되었다.

1290년에 착공된 대성당은 이탈리아의 고딕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내부의 벽기둥에 있는 부조(浮彫)가 유명하며, 산브리치오 대성당의 내부는 프라안젤리코(Fra Angelico)와 루카 시뇨렐리(Luca Signoreli)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주교관저와 포폴로 궁전, 교황궁 등 13세기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다. 교황궁의 일부는 시민박물관이 되어 미술작품들과 볼시니라고 하는 인근 에트루리아인(人)의 고분에서 발굴된 고대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 산안드레아 성당(11∼12세기)와 산도메니코 성당(1233∼1264), 공원으로 쓰이는 옛 요새(1364), 산패트리티우스 샘 등 유명한 유적지가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오르비에토 [Orvieto] (두산백과)

성체성혈 대축일의 기원 오르비에또

1263년 보헤미아의 프라하의 Petzer 신부는 로마로 순례가던 도중 볼세나(Bolsena)에서 묵게 되었다. 그는 경건한 사제로 알려져 있었으나, 축성된 면병 안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계신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가 순교자 성녀 크리스티나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에서 미사성제를 거행하고 있었는데, 성체 축성을 하자마자 축성된 면병으로부터 피가 흐르기 시작하여 신부의 손가락들을 적시고, 제대와 성체포(聖體布) 위로 흘러내렸다.
신부는 몹시 당황하였다. 처음에는 피를 감추려고 했으나, 곧 그는 미사를 중단하고, 마침 교황 우르바노 4세가 머물고 있던 이웃 도시 오르비에또(Orvieto)로 인도해 달라고 하였다. 교황은 신부의 보고를 듣고 나서 그를 사면(赦免)하고, 즉시 이 일을 조사하도록 성직자들을 파견하셨다. 모든 사실이 밝혀졌을 때, 교황께서는 그 교구의 주교에게 그 성체와 피묻은 성체포를 오르비에또로 모셔오도록 명하셨다. 추기경들과 대주교들, 그리고 그 밖의 고위 성직자들 앞에서, 교황은 성체를 모셔오는 행렬을 성대하게 하고, 성체와 성체포를 대성당 안으로 모셨다. 성혈이 묻은 성체포는 아직까지도 오르비에또의 대성당 안에 정중하게 보관되어 전시되고 있다. 이 기적으로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에게 성체를 공경하는 기도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이 기적이 있은지 1년이 지난 1264년 8월에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도문(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을 소개하고, 성체성혈 대축일(the Feast of Corpus Christi)을 설정했다. 오르비에또의 대성당을 찾아오는 많은 순례자들은 그 곳에 이어서 볼세나에 있는 성녀 크리스티나 성당으로 가서 그 기적이 일어났던 현장을 둘러본다. 성당의 북쪽 복도로부터 기적이 일어났던 소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성체 축일 설정의 700주년이었던 1964년 8월에 교황 바오로 6세는 기적의 성체포가 모셔져 있는 오르비에또의 대성당에서 미사 성제를 거행하였다.
12년이 더 지난 1976년에 바오로 6세는 볼세나를 방문하고, 그 곳으로부터 그 때 필라델피아에서 열리고 있던 제 41차 국제 성체 대회에 텔레비젼을 통하여 성체가 “위대하고도 무한한 신비(a mystery great and inexhaustible)”라고 선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