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는 이탈리아에서 아주 오래된 도시이다. 에트루리아인들과 로마인들에 의해 세워진 많은 유적지를 비롯해 각 시대에 걸쳐서 세워진 성당들, 파손된 절벽들, 총 자국들로 얼룩진 성벽과 성문들은 모든 이탈리아 역사를 상기시킬 만큼 방대하다. 움브리아는 에트루리아인들에 의해 형성되어 로마 문명에 의해 발전해 오다가 3세기때 주교이며 순교자인 성 루피노에 의해 그리스도교화 되었다. 542년 경 동고트왕국의 토틸라 왕에게 점령되었고 후에 스폴레또 공국으로 합병되기도 했다. 12세기에는 자유도시로서의 꽃을 피웠지만 12세기-14세기에 걸친 페루지아와의 내전, 교회와 황제간의 권력투쟁의 시기를 거쳐 16세기에는 교황령에 속해있다가 1860년에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될 때까지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단일한 하나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현재 아시시는 행정구역상 페루지아에 속해있으며 약 3만 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있고 5천명 정도가 도시 내에 거주하고 있고 주교좌 성당도 있다.
이 역사적, 예술적 유적들과 함께 성 프란치스코의 탄생은 그 가치를 더했다고 볼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성인의 무덤 위에 세워졌으며 이 도시에서 시작된 그의 신비주의적 영성의 원천은 온 도시로 확산되어 모든 인종과 종파를 초월해 전 인류에게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시시에서 평화를 추구하며 개최되는 유명한 모든 국제적인 행사는 오직 하느님께서 피조물을 사랑하신 것처럼 모든 피조물을 사랑했던 가난한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에서 기인한다. 그가 남긴 거룩한 정신의 향기는 대성당 내에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여기에서 이탈리아의 뛰어난 화가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방자인 성인의 “놀라운 생애”를 그렸던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의 아시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done)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출타 중일 때 어머니가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프랑스를 좋아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개명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젊은 날을 방탕하게 지내다가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1202년에 투옥되었다.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듯 보이다가 중병을 앓았고, 병에서 회복한 뒤로는 딴사람이 되었다. 그는 성 다미아노 십자가 밑에서 “내 교회를 고쳐라”는 말씀을 들으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옛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는 버려진 옛 산 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에서 들은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물건을 내다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사건 때문에 그는 부친과 결별하게 되었고, 허름한 농부의 옷을 입고 ‘가난 부인’을 모시는 통회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동료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고, 3년 후인 1209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가 극도의 가난을 살려는 그와 11명의 동료들의 삶을 인준하였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 곧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본부는 아시시 교외 현재 천사들의 성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degli Angeli-프란치스코 사후에 포르치운꿀라 성당 위에 세워짐)에 있는 포르치운꿀라(Porziuncula) 성당이었다. 이 작고 허름한 성당에서부터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수도회는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나무로 성장하였다. 이탈리아 내외를 두루 다니면서 형제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회와 보속의 생활을 단순한 말로 가르쳤다. 그들은 재산과 인간적인 지식 소유를 거부하였고 교계 진출 또한 사양하였다. 1212년에 그는 성녀 클라라(Clara)와 함께 ‘가난한 부인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는 모슬렘(사라센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 ‘말렉 알 카멜’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는 성지를 방문한 뒤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217년부터 이 수도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하여 조직이 강화되면서 발전의 폭이 커졌다. 관구가 형성되고 잉글랜드(England)를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참으로 놀라운 발전을 하였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장상직을 사임하였다. 이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 부터 구두(口頭)로 인준 받은 회칙을 우고리노(Ugolino) 추기경의 도움으로 확정짓고 교황 호노리오 3세로 부터 승인을 받았다. 1224년 그가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이었다. 그리스도의 오상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되면서 그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2년 후에는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지금도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공경은 세계 도처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가 세운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도 다른 재속회원과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그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 그는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그는 1226년 10월 3일 시편 43장을 노래하면서 운명하였고, 그의 유해는 다음날 아시시에 있는 산 조르조(San Giorgio) 성당에 안장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2년 후인 1228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230년 5월 25일 그의 유해는 엘리아가 그를 기념하여 지은 대성전의 지하 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그를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아씨시의 가난뱅이 프란치스코 만큼 교회 안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다시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녀 클라라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귀족인 오프레두치오와 오르톨라나디 피우미의 딸로 태어난 성녀 클라라(Clara)는 용모도 뛰어나서 12세 때 혼인을 서두르는 부모들의 강권을 물리쳤으며, 1212년 사순절 때 성 프란치스코의 설교에 크게 감명을 받고 수도생활을 결심하였다. 그녀는 성지 주일에 부모 몰래 집을 빠져나와서 포르지운쿨라에서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수도복을 받았다. 프란치스코는 아직 여자 수도원을 세우지 않았으므로, 바스티아 근방 성 바오로(Paulus)라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그녀가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들이 그녀를 강제로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므로 끝까지 항거하다가, 산 안젤로 디판초로 옮겼는데 그 얼마 후에 15세 된 동생 아녜스까지 언니에게 와서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녀의 부친은 12명의 장정을 무장시켜 아녜스나마 데려오려고 하였지만, 클라라의 간절한 기도의 힘에 의해 끝내 아무도 데려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산다미아노(San Damiano) 성당을 모원으로 확정하였으며, 이들을 위한 생활양식을 써줌으로써 가난한 부인회가 탄생된 것이다. 이 회가 잉글랜드(England)에서는 작은 수녀회(Minoresses)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클라라회이다. 클라라는 1215년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로부터 ‘가난의 특권’을 얻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애긍에 의존해도 좋다는 허락이다. 그 후 클라라는 이 특권을 유지하는데 늘 고심하였고, 교황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수녀들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반대해서 많은 곤경을 겪었다. 클라라회의 수녀들은 당시 어느 수도회보다도 엄격하고 가난하였다. 그러나 클라라를 비롯한 동료들은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었으며,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녀는 약 40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였지만 늘 건강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성 프란치스코의 뜻이 담긴 클라라회의 회칙은 그녀가 운명하기 이틀 전에야 겨우 승인을 받을 정도로 그 엄격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던 것이다. 클라라회는 급속도로 이탈리아 전역과 프랑스, 독일로 보급되었고 교황과 추기경 및 주교들의 자문 역할로써 떨친 그녀의 영향도 지대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기적으로 더욱 영광스럽게 되었는데, 1241년 그녀의 기도로 프레데릭 2세의 난폭한 군인들로부터 아시시를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1253년 8월 11일에 아시시에서 운명하였는데, 2년 후에 곧바로 시성되었다. 클라라는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이고 문장은 성광(성체현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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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이 성당은 이곳에서 태어나 작은형제회를 창설한 성 프란치스코를 기리어 세워진, 작은형제회 최초의 성당이다. 1228년에 기공하여 1253년에 완성된 이 건물은 비탈이 많은 지형을 살려 상하 두 쌍으로 된 진기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밖으로 드러나게 나타나는 장식다운 장식을 찾아볼 수 없는 대신, 피에트라 아시시(아시시의 돌)라고 불리는 이 지방 특산의 담홍색 용재가 야코포 다 아레만니아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성당 전체를 아름답게 채색하고 있다. 또한 상하 양당의 내벽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를 앞선 13∼14세기의 프레스코 그림이 많이 남아 있으며, 특히 상당의 지오또 작(作)이라고 이르는 일련의 벽화가 있는데 대성당 상부의 벽 위쪽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려져 있고 벽 아래쪽에는 프란치스코의 생애가 묘사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는 유명한 《작은 새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치스코》 등이 있다. 대성당 하부에는 치마부에의 작품 등 유명한 작품이 있으며 하부 성당 옆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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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글라라 대성당

성녀 클라라 대성당 자리에는 성 죠르죠 성당이 있었다. 클라라 자매들은 1253년 성녀 클라라가 귀천하자 성 다미아노와 성 죠르죠 성당을 바꿀 것을 주교좌 의전사제단에 제안하였다. 후에 성프란치스코의 사도였던 성녀 클라라에게 바쳐졌으며 1257 ~ 1265년에 걸쳐 세워진 고딕 양식의 교회이다. 지하실에는 성녀 클라라의 유해와 유품들이 있다. 또한 이 성당에는 프란치스코에게 “나의 집을 고쳐라!”고 말씀하신 산 다미아노의 십자가가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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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성 마리아 대성당

아씨시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금장으로 된 성모님께서 성당 지붕에 모셔져 있는데 이 성당이 바로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다.
이 대성당은 성당 안에 작은 성당인 ‘뽀르치운꿀라(Porzinuncula)‘ 가 있다. 이 소성당은 성 프란치스코가 가장 사랑했던 곳이며 초기 동료들, 작은 형제회의 삶에 있어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던 곳이다. 그리고 뽀르치운꿀라의 뒤쪽 오른편에는 작은 경당에서 성인께서는 돌아가신 곳이다. 이 경당에는 안드레아 델라 로비아의 토기 작품인 성 프란치스코가 있다. 이곳 외에도 다른 경당들은 벽화와 유화로 장식되어 있는데 성 안토니오 경당, 오상 경당과 세례자 요한 경당, 성 디에고 경당, 성 안나 경당, 구유 경당, 알깐따라의 성 베드로 경당 등이 있다. 성당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장미밭으로 가는 통로를 지나면 작은 장미밭이 창 너머로 보인다.
이곳은 성인께서 강한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가시덤불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졌던 곳이다. 그 이후 이 장미밭에는 가시가 없는 장미가 자란다고 한다.장미밭을 지나면 ‘장미 경당’이 있는데 이 곳은 성인께서 포르치운꼴라에 돌아왔을 때 보통 머물던 움막이라고 한다. 성인을 여기서 쉬었고 밤을 새워 기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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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 시내

성녀 클라라 성당에서 시청광장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탁월한 한 건축가의 우아하고 다채로운 도기장식이  짧은 길로 니려가도록 이끄는데, 그 아래에는 성프란치스코가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 삐꼴리노(작은 프란치스코) 소성당이 있다. 성 프란치스코 삐꼴리노는 성인이 태어난 장소이다. 1250년 안젤로의 아들이며 성 프란치스코의 조카인 리카르도는 성인 생가의 일부였던 이곳을 소성당으로 만들고 1281년 외부의 거대한 아치와 함께 새롭게 장식했다. 1300년 초, 고딕 양식의 아치형 문 위에 라틴어로 “이 소성당은 소와 당나귀가 있던 마굿간으로 세상의 거울이 되신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 곳”이라고 씌여졌다.

삐꼴리노 소성당을 뒤로하고 돌면 왼편에 NUOVA(새로운) 성당이 있다. 이성당은 1615년에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성 프란치스코의 아버지)의 집이었던 것이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시청광장 왼쪽에 기원전 1세기경에 세워진 미네르바 신전이 있었던 곳에 지금은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이 있고, 그 옆에는 약 1275-1305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청 탑이 있다. 탑 아래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13세기말경에 많이 사용하던 계량기가 있고 좀 더 외니편에 1212-1282년의 중세시대의 행정관 건물이 보인다. 광장 오른 편에는 1337년에 시작된 프리오리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현재 시의 행정업무와 12세기에서 17세기 움브리아 학파들이 그린 미술품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