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남쪽 약 50km 지점, 옴브로네강의 지류 사이에 끼어 있는 해발고도 320m의 구릉에 위치한다. 포도주 산지로서 유명한 키안티 산지에 위치하여 포도주 ·대리석 ·농기구 등을 생산한다. 시는 에트루리아인이 건설하여, 로마인의 식민시가 되었으나, 현재 고대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벽돌과 석재로 축조된 중세의 시가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중세에서 근세에 걸쳐 피렌체․아레초 등의 도시와 교황세력, 에스파냐 세력이 시에나의 지배를 둘러싸고 서로 다툼으로써 침략당하기도 했다. 1559년 이후에는 토스카나 공국(公國)에 병합되어 이탈리아 통일에 이르렀다.
시에나의 르네상스는 14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특히 회화에서는 14세기 전반에 시에나파(派)가 성립되었다. 카시아 가도(街道)에 위치하고 있으나 간선철도에서 떨어져 있으므로 근대도시로서의 발전은 별로 없고, 옛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이탈리아 고딕양식의 대표로 알려진 시에나 대성당, 코르사델팔리오(중세풍의 경마)가 해마다 열리는 캄포 광장, 만자탑(塔)이 있는 시청사 등이 있다. 그 밖에 13세기에 창건한 대학, 음악 아카데미 등이 있으며, 이들 건축물과 풍부한 르네상스 미술 작품에 의해서 중부 이탈리아의 중요한 관광도시이다. 성녀 카타리나가 1347년 3월 25일 성모 영보 축일에 태어난 곳이 시에나이다. 성녀께서는 1380년 4월 29일 서른 셋의 젊은 나이로 선종했고, 1461년 교황 비오2세는 시에나를 방문하고 카타리나를 성인품에 올렸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성녀 카타리나 베닌카사(Catharina Benincasa, 또는 가타리나)는 시에나의 한 염색업자의 2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생기발랄하고 상냥한 성격을 지녔으며, 아버지가 항상 점잖게 굴라고 하는 말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불과 6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생애를 미리 보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그녀는 부모가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모든 노력에 반항하고, 오로지 기도와 단식에만 전념하였다.

그녀는 16세 되던 해에 도미니코 3회원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리스도, 마리아, 성인들에 대한 환시는 더욱 잦아졌고, 동시에 악마적인 환시도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나병환자와 같은 절망적인 병을 앓는 환자들을 간호하는 일을 즐겨하였다. 그녀가 받은 초자연적인 선물들로 인해 열렬한 지지자들이 지나치게 열광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혹시 협잡꾼이 아닌가 하여 고발됨에 따라 도미니코회의 총회 석상에까지 출두한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카푸아(Capua)의 복자 라이문두스(Raymundus, 10월 5일)가 그녀의 고해신부로 임명되었으나 곧 그녀의 영적 친구가 되었고, 후일에는 그녀의 전기 작가가 되었다.

시에나로 돌아온 성녀 카타리나는 페스트로 황량해진 도시에서 주민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고, 선고받은 죄수들을 찾아 돌봤으며, 평화를 전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분쟁을 해결하였다. 그녀는 터키인에 대항하고자 십자군을 모집하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Gregorius XI)를 적극 지원하였고, 1375년 피사를 방문하는 도중에 오상 성흔을 받았다. 그런데 이 오상은 생전에는 잘 볼 수 없었는데, 임종할 즈음에는 확연히 드러났다고 한다. 그녀는 피렌체(Firenze)와 로마(Roma)의 그레고리우스 교황 간의 불화를 중재하는 데에는 실패하지만, 아비뇽(Avignon)의 교황좌가 1376년에 로마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후로는 자신의 신비적인 체험들을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여 “대화”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1378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서거하고 우르바누스 6세(Urbanus VI)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이를 반대하는 일단의 추기경들이 스위스 제네바(Geneva)의 로베르투스(Robertus)를 대립교황(클레멘스 7세)으로 선출하는 사건이 발생해 교회에 큰 분열이 일어났다. 이처럼 혼란한 시기에 성녀 카타리나는 단호히 우르바누스 6세 교황을 지지함으로써 분열을 종식시키고 교황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고행과 희생으로 인해 극도로 쇠약해진 그녀는 결국 1380년 4월 29일 33세의 젊은 나이에 로마에서 숨을 거두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그리스도교의 신비가 중에서도 대가에 속한다. 그녀는 “대화” 외에도 400여 통의 서한들을 남겼다. 그녀는 1461년 교황 비오 2세(PIus II)에 의해 시성되었고, 1939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1970년 10월 3일 교황 복자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1999년 10월 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를 누르시아(Nursia)의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 성 메토디우스(Methodius, 2월 14일)와 성 키릴루스(Cyrillus, 2월 14일) 형제,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Birgitta, 7월 23일), 십자가의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에디트 슈타인 Edith Stein, 8월 9일)와 함께 유럽의 여섯 수호성인 중 한 명으로 지명하였다.

시에나의 성체기적

기록에 의하며 시에나에는 1730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348개의 성체가 보관되어 있던 성합이 도난을 당하였다. 후에 이 성체가 모셔진 성합은 산타 마리아(Santa Maria) 성당의 헌금함에서 발견되었다. 성체 모독을 방지하기 위해 자연 부페 되도록 되찾은 이 성체를 중 223개의 성체를 얼마 동안 보관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매우 놀랍게도 그 성체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하얗고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1780년에 보관되어 있었던 223개의 성체의 조사를 실시하였다. 화학자, 대학교수, 그리고 시에나의 대주교 하에 있는 학자들로 구성된 법정위원회에 넘겨 연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 결과를 보면 ‘이 성체들은 실제로 산성화되지 않은 빵의 중요한 구성성분인 전분이 포함된 반죽으로 만들어졌고, 성체의 보관상태는 매우 양호하였다.’ 이 성체를 새로운 방법으로 계속해서 연구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시에나의 이 놀라운 성체기적에 관해 자주 언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