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죠반니로톤도에서 고고학적인 발견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역사 이전부터 인류가 살았다는 것이다. 몬테칼보(산, Mont Calvo) 아래 풀리아 지방에 있는 도시로 그 이름은 무너진 주피터 신전 위에 세워진 원형(Rotondus)의 세례당에서 비롯되었다. 성 오노프리오 성당은 13세기에 세워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곳은 은총의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회의 피에트렐치나 출신 오상의 비오 신부로인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다. 현재 이곳 지하에는 성 비오 신부의 무덤이 있다. 1968년 성 비오 신부의 고행의 삶은 유명하였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위로집이라는 거대한 병원을 건립함으로써 이 작은 마을을 풍요함의 요지로 만들었다.

대성당 오른쪽으로 가스뗄라나 산(해발 965m)에는 프란체스코 메씨나에 의해 십자가의 길이 만들어져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모든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십자가의 길을 바친다.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오상의 비오)

성 비오 신부님의 세속명은 프란체스코 포르죠오네로서 그는 1887년 5월 25일 피에트렐치나의 한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5살때 자신을 예수님께 봉헌했고, 15살인 1903년 1월 6일 피에트렐치나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지 않은 로르꼬네에 있는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911년 9월 7일부터 그의 두 손에 예수 그리스도의 상흔이 나기 시작하였고 이는 1918년까지 거의 매주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15년 군에 소집되었지만 병가가 반복 되었고 결국 기관지염으로 군복무 불능 판정을 받아 1918년 3월 산죠반니로톤도의 수도원으로 복귀하였다.  1918년 9월 20일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그리스도의 오상이 새겨진 것을 알게 되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1923년 6월 17일에 그는 수도원 내의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하되 외부인은 참례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고, 그에게 오는 편지의 답장도 금지당하였다. 미사는 6월 2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봉헌하게 되었으나, 그 뒤 교회의 제재는 몇 차례 되풀이되었다. 1931년 6월 9일에는 미사 이외의 모든 성무집행이 정지되었고, 미사도 경당에서 복사 한 명과 봉헌하도록 제한되었다. 이틀 뒤 이 명령을 전해들은 성 비오 신부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순명하였다.

격리된 기간 동안 성 비오 신부는 미사집전과 기도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가 1933년 7월 16일부터 다시 성당에서 공개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4년 3월 25일부터 남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고, 5월 12일부터는 여자들에게도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다. 그는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애정으로 1947년 5월 19일에 ‘고통을 더는 집'(Casa Sollievo della Sofferenza)라는 병원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 병원은 1956년 5월 5일에 완공되어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1960년 8월 10일 성 비오 신부의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축하식이 거행되었고, 1963년 1월 22일에는 수도복 착복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그리고 1968년 9월 20일 그의 오상 50주년을 축하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성 비오 신부는 1968년 9월 22일 오전 5시에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날인 23일 월요일 새벽 2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26일 지하성당에 안치되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충만한 성 비오 신부는 인간 구원을 위한 자신의 성소를 충실히 살았다. 그는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신자들을 영성적으로 지도하는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였다.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거행에 충실했으며, 특히 미사성제를 통하여 그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영성적인 충만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곧 삶이었다. 그는 모든 의지를 신앙 안에서 세웠고 모든 행실을 신앙 안에서 행하였다. 그는 열성적으로 기도생활에 투신하며 많은 시간을 하느님과의 대화로 보냈다. 그는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신앙은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알 수 없는 뜻마저도 받아들이게 인도하였다.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였다. 또한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비판과 오해를 풀어나갔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어가는 1971년 2월 20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는 카푸친회 장상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비오 성인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비오 신부님이 얻은 명성을 보십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가 겸손하게 미사를 지내서 그렇습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고해소에 머물며 고해를 들어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쉽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이었습니다.”

성 비오 신부의 거룩함과 명성은 살아서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더욱 커졌다. 그래서 1969년부터 그에 대한 시복시성이 절차가 시작되었다. 1982년 11월 29일 그는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시복 추진에 대한 ‘장애 없음’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9년 5월 2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6월 16일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30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예수님의 오상을 받아서 ‘오상의 비오 신부’로 불리는 그는 또한 ‘파드레 비오'(Padre Pio)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를 존경하여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으로 ‘비오 신부님’이란 의미이다.